친구 만나러 가는 길
내가 죽어서 물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쓸쓸해집니다. 산골짝 도랑물에 섞여 흘러내릴 때, 그 작은 물소리를 들으면서 누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냇물에 섞인 나는 물이 되었다고 해도 처음에는 깨끗하지 않겠지요. 흐르면서 또 흐르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조금씩 씻어내고, 생전에 맺혀있던 여한도 씻어내고, 외로웠던 저녁, 슬펐던 앙금들을 한 개씩 씻어내다 보면,
결국에는 욕심 다 벗은 깨끗한 물이 될까요. 정말 깨끗한 물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내가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내 온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지게 될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송두리째 가진다는 뜻을 알 것 같습니까.
부디 당신은 그 물을 떠서 손도 씻고 목도 축이세요. 당신의 피곤했던 한 세월의 목마름도 조금은 가셔지겠지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몸안에서 당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죽어서 물이 될 것이 전연 쓸쓸한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마종기 '물빛'中에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들입니다.
계곡으로 여름 휴가를 다녀 온 다음날 집에서 쉬는데, 불현듯 친구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기적이게도 직장생활로 한참 바쁠때는 잊고 지내다, 이처럼 한가로운 날들을 맞게되면 어김없이 떠올려지는게
옛친구들의 얼굴입니다.
내 그리움의 원형(原形)을 간직한 친구를 만나러 길을 나섭니다.
자가용을 몰고 다니다 보니 버스를 타 본 기억이 오래전의 일로 가물가물합니다.
김해에서 부산대 앞으로 갈려면 버스를 어디서 타는지 요금은 얼만지 모든게 생소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버스 종점으로 향하였는데 부산대 앞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있더군요.
1,000원의 버스 요금을 지불하고 학창시절 버스를 타게 되면 붙박이 지정석처럼 앉게되던 출입구 방면 맨 뒷좌석 자리
바로 앞 좌석에 몸을 실어 봅니다.
어릴적부터 그쪽 자리가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그 자리에 앉아 차창밖 풍경과 사람들 모습을 바라보는게
흥미로운 일 중의 하나였으며, 제 나름대로 지루함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하였지요.
자가용을 몰고 많이 다녀 본 길이었지만 버스를 타고 나가는 길은 실로 오랜만입니다.
자가용을 타면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과 느낌 할 수 없었던 낯익은 일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쌍쌍이 웃으며 지나는 연인들...
무표정한 모습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는듯한 사람들...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들
일상의 피곤함이 배어나오는 무거운 발걸음의 사람들 등...
행여 늦을까 하는 마음에... 친구를 만난다는 앞선 그리움 때문에 서둘러 일찍 나선 길인지라 도착하니
약속시간인 6시에서 40여분 시간이 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간 때우기에는 서점만큼 유용한 곳이 없지요.
마침 약속장소 바로 옆 건물 지하에 서점이 있음을 알리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 오더군요.
아주 사적인, 긴만남
전 큰 고민 없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됩니다.
평소 좋아하던 시인과 뮤지션인 이 둘의 만남.
1939년생의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님과 독특한 음악세계를 가진
1975년생의 공학박사이자 가수인 루시드폴.
이 두사람의 교감의 기록, 책 제목처럼 지극히 사적인 서간집.
전 친구에게 줄 선물로 이 책을 고르게 됩니다.
親舊, 오래두고 가깝게 사귄 벗이자, 교감을 나누며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을 이어오는 사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친구라는 이 정겨운 말과 단어가 요즘들어 왜 이리들 가볍고 천박하게 사용하는지...
좀 안다 싶으면 친구라는 말을 갖다 붙이고, 어이 친구, 이보게 친구 정도로 불리우는
경박함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었는지...
이 친구는 저의 군대 동기입니다.
자대동기가 아닌 인제 원통의 12사단 신병교육대. 즉 20년지기의 훈련소 동기이지요.
교육학 박사로 지금은 대학교수로 재직중인 이 친구와 난 지금껏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올해 돌아가신 이 친구의 아버님과도 서신을 주고 받으며 교감을 나눠 왔었지요.
삶을 살아가면서 좋은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데,
속내를 드러내보일수 있는 이러한 사람,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돌아오는 길,
친구는 그 책을 읽으며 나를 생각할 것이고, 루시드 폴의 음악을 들으면서 읽는 마종기 시인의 시집은
나에게 또다른 어떤 인생을 선사할지 은근 기대되는 저녁.
부산에서 김해로 돌아오는 밤 늦은 저녁길, 달빛을 머금은 낙동강 물결이 꿈결처럼 아름답게 일렁입니다.
20009년 8월에 ebond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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