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에 대한 고찰.
근래 욕에 대한 책이 더러 눈에 띈다.
내가 다니다 만 인제대의 김열규 교수는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이란 저서를 통해 욕을 깊숙하게 탐구하고 있다.
김교수는 "욕이라고 해서 굴레 벗은 말은 아니다. 개망나니는 더욱 아니다. 욕일수록 얌치 갖추고 경위 바르다. 좀 사납고 망측하긴 해도 경위 바른 것으로 보상되고도
남는다. 경위 없이 잘나고 얌치 없이 지체 높고 점잖은 축들보다야 백배 나은 게 욕이다"고 했다.
그는 최근의 인문학이 이른바 적고 작은 기호, 묻히고 가려진 텍스트들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그나마 조금 철이 들었기 때문이라며, 욕 또한 묻히고 가려진 텍스트의
하나로 보았다.
또 역사성과 사회성을 가진 무형으로서의 욕은 한국 문화의 상을 만들어 가는 데 버릴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라고 가치를 부여하면서 이것은 역사의 민주화라고 단언했다.
소설가 정태륭씨는 '한국의 욕설백과'를 내놓았다.
그는 이 책에다 우리의 상소리, 육두문자를 포함하여 모든 욕지거리를 집대성해 놓았다.
그는 우리의 토속 정서가 진득한, 그럼에도 돌보지 않아 사라져 가는 욕설을 통해 우리 고유의 맛깔스런 벌거숭이 말맛, 원초적인 삶의 맛을 음미해 본다고 했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듯이 욕이란 근엄하거나 점잖아서는 안된다.
일단 점잖지 못해야만 욕이 될 수 있다.
그 누구에게 아무리 극심한 저주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저주의 표현형태가 점잖아서는 욕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욕의 한계다.
상스럽고 망측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벌거숭이 같은 말, 육두문자, 격과 품위를 깨뜨리면서 폭발하는 말, 이런 것이어야
욕이 될 수 있다.
또한 토속적인 언어의 질감이 진하게 배어있을수록 멋진 욕이다.
그러면서도 김열규 교수의 지적처럼 경위가 발라야 한다.
상스럽고 망측하기만 해서는 안된다.
상스럽고 망측함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비유와 구성과 운율까지 들어있는 것이 욕이다. 그래서 욕을 할 때 자세히 들어보면 보통 때 하는 말과는 억양이 상당히 다르다.
특유의 억양으로 점잖은 말로써는 담아낼 수 없는 해학과 풍자를 띠고 있다.
따라서 욕이란 음지를 무대로 하는 하나의 문학형태라고 할만하다.
그야말로 돼먹지 않은 상소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것은 욕이 아니라 패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욕이란 내용보다는 표현형태를 더 중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상당히 나이 든 사람들이 친구끼리 주고받는 욕을 들어보면 욕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욕을 통해서 친근감을 느끼고 욕에다 정을 실어보내고 욕에 실려오는 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쾌한 욕도 대상과 공간이 제한되어 있다.
상대가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 자리가 허물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나쁜 감정을 담아서 2인칭 또는 3인칭으로 표현하는 '새끼'라는 말이 있다.
이 또한 욕이 될 수 있는 말이다.
아주 가까운 친구끼리 만나서 아무런 흉허물없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유쾌하게 들리는 욕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한 욕으로서의 호칭은 '새끼'가 아니라 '자식'이었다. '이 자식아, 이 나쁜 자식아'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새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새끼'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동물에게 쓰는 말이다.
한자로도 다르다. 자식은 '子', 새끼는 '仔'이다.
돼지새끼를 한자로 쓰면 '仔豚'이지 '子豚'이 아니다.
할머니들이 손자를 귀여워하면서 '아이구 내 새끼'라고 하는 것은 정을 듬뿍 담아서 하는 말이지 예사스런 말은 아니다.
심지어는 '내 강아지'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흉허물없는 친구끼리 또는 할머니가 손자, 손녀에게 정을 담아서 부르는 '새끼'는 욕이 아니다.
요즘에는 조직사회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흔히 '새끼'라는 말을 쓰는데, 아주 잘못된 말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개새끼'라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흉허물없는 사이에 친근하게 부르는 말도 아니고 정을 담아서 부르는 말도 아니다.
욕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욕이란 상스럽고 망측할망정 경위가 발라야 한다.
그리고 쓸 자리가 따로 있고 쓸 상대가 따로 있다.
그런 요건도 갖추지 못한 채, 서로 격식을 깨뜨릴 만한 사이도 아니면서 직위가 높다는 것 하나만으로 상대방을 '이 새끼야, 개새끼야' 식으로 불러대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을 의심케 하는 패악일 뿐이다.
반대로 동물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 같은 데서 새끼와 대비하여 어미 동물을 엄마라고 하는 해설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이것 또한 사람과 동물을 혼동한 잘못이다.
당연히 어미라고 해서 '어미 사자, 어미 코끼리'라고 해야 한다.
오래된 동요 '송아지'에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라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좀 색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유한 욕으로서의 호칭은 '새끼'가 아니라 '자식'이었다.
'이 자식아, 이 나쁜 자식아'라고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새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e,b,on,d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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