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푸른밤
오래전 방영했던 단편 드라마가 있다.
내용은 한 여자에게 상처만 주었다고 생각했던 한 남자가 불치의 병으로 죽기 전에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는 노숙자로 죽기 직전까지 공사장 막일, 시체 닦는 일, 대리 운전 등을 해서 모운 것을 남기고 떠난다.
그것은 제주도행 비행기표와 월세 보증금 300만원...
그는 죽기 직전까지 그 여자에게 해준게 없었던 점을 너무 미안하고 가슴아프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은 달랐다.
그 때문에 낙태를 비롯한 온갖 고생을 하고, 결국 아내를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이발소 주인에게 시집가게 되었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그는 항상 보고싶고, 미안하고, 또 멀리서 한번 찾아와 준 것에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다.
그래서 더 가슴아픈 이야기이다.
같이 본 집사람은 '여자에게 잘 못해준것만 기억하는 남자와 남자가 잘 해준것만을 기억하는 여자의 이야기'
라는 리플을 본적 있다 했다.
그말에 동감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상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내가 잘 해준것만 기억하고, 남이 잘 못해준것을 섭섭해 한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반대가 된다.
내가 잘 해준것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반면 내가 잘 못해준것이 너무 후회가 되고 미안하다.
심하게는 잘 해주지 못한 자신에게 책망이 들기도 한다.
이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
모든것을 다 주었는데도 미안하고 더 잘해주지 못한것이 후회가 된다.
어쩌다가 자식이 자신을 한번 생각해 준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고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게 된다.
부모님이 자식에 대한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미안함'이 아닐까 한다.
그 미안함 속에는 온몸을 내더지는 뜨거운 사랑도 들어있고, 모든것을 다주어도 보상받기를 바라지 않는 헌신도 들어있다.
끝없이 미안하고 끝없이 고맙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눈가가 뜨거워진다.
나는 내주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정 미안해 하고 있는가?
그러지 못했음을 이제야 미안스럽게 생각한다...
드라마속 그녀가 부른다.
"제주도 푸른밤"을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이상 얽메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 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 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밤 하늘 아래로
떠나요 둘이서 힘들 게 별로 없어요
제주도 푸른밤 그 별 아래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아요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찍기 구경하며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르매가 살고 있는 곳 "
일상과 낯설게 하기
난 불현듯 그 드라마를 생각하며, 제주도로 가고 싶었다.
몇번이나 훌쩍 떠나려다 여러 가지 여건과 제약 때문에 쉽사리 떠나지 못하던 차 이번에는 반드시 떠나리라 마음 먹고,
항상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 미안스러운 대상인 집사람과 함께 3박4일간 일정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결혼이후 애들을 두고 떠나는 여행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리라.
여행 일정도 어떤 목적도 없이 떠난터라 딱히 여행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지만 편의상 여행이라고 해 두자.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일상과 낯설게 하기’다.
매일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면 기차를 타보고, 항상 똑같은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이용해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장소가 눈에 띄면 차를 세우고 풍경을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름 휴가철 벌떼처럼 몰려가 고생하지 않고 봄.가을의 초입에 한적한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실 여행의 성공 여부는 장소가 아니라 누구와 같이 가느냐와 어떻게 느꼈느냐로 판가름난다.
‘어디로’는 수단이고, ‘누구’와 ‘어떻게’가 목적이 돼야 한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는 동남아나 해외보다 옥빛바다와 야자수등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휴양과 휴식을 할 수 있는 제주도가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차량정체와 매연, 사람과의 부딪힘을 느낄 수 없는...
최근 제주에서는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기존의 획일적인 관광지와 코스를 벗어나 제주의 속살을 볼 수 있는 자연생태체험의 올레길 도보여행이 유행이다.
각 구역별 코스가 개발되어 현재 12코스가 만들어져 있다.
제주의 푸른바다, 푸른 바람을 맡으며 서귀포 앞바다가 내여다 보이는 제7코스길에 올랐다.
외돌개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고 아래로 향하자 고구마 굽는 냄새가 흘러간 팝송음악에 실려 발걸음을 이끄는
솔빛바다 찻집이 고즈넉하게 우릴 맞는다.
통나무 탁자에 앉아 솔빛바다향기를 맡으며 모처럼의 호기로운 기분을 맛본다.
이 얼마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움인가.
누가 그랬던가?
물건은 망설여지면 안 싸면 되고, 여행은 망설여지면 떠나면 된다고...
푸른 바다.바람의 노래를 듣다
사실 제주로 향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위로 눈부신 해가 뜨고 지는 그림들과 멋진 구름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제주에 도착하니 실망스럽게도 육지에서와 마찬가지의 우울한 잿빛하늘이었다.
하지만 섬이라는 곳이 날씨가 워낙 예측 불가능하고, 하루에도 그 낯빛을 여러번씩 바꾸기에 큰 걱정은 안하였다.
렌터카를 인도 받아 애월~한림간 해안도로를 달리다, 난 딱히 어디로 가야 할 목적지가 없는 탓에 협재해수욕장 인근
금능마을의 한 숙소(코지하우스)에서 여장을 풀어야 했다.
횟집에서 바라 본 코지하우스
파아란 하늘보다는 회색의 잿빛 하늘이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었고, 제주임을 실감케 하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게다가 봄이 가장 먼저 온다는 이 곳 제주에서 4월인데도 밤은 쌀쌀하게만 느껴진다.
지금껏 살아왔던 것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듯 하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도 않을 뿐더러 때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큰 아픔을 맛보기도 하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던 때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어쩌면 그 행복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크고, 더 오래 남는 것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살아가는 날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내가 깨달은 유일한 지혜라고는 그렇게조금씩 비워가는 것...
욕망을 조금씩 바수워내는 것...
불교에서도 '무(無)'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우라는 의미일 것이었고,
'무심(無心)하라'고 한 것 역시 마음이 없거나 관심을 끊으라는 것보다는 그저 마음을 비우라는 의미였을 것이었다.
협재 옆의 한 마을을 찾았을 때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해녀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면 하는 욕심도 없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전봇대가 늘어선 길에 대한 미련도 마을에 접어들면서 내려 놓았다.
그냥 뭐가 되었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면 담아보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조용하기 그지없는 바닷가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아도 좋을 듯 했다.
그리고 그 마을의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골목에 서 있는 조금은 오래되어 보이는 승용차도, 화강암으로 세워진 담벼락도,
푸르기도 하고 파랗기도 한 지붕들도, 널려있던 빨래들도, 섣부르게 피어있던 이름모를 꽃도....
다만, 내가 부족해서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들을 제대로 내보이지 못할 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둑해지자 낮엔 잿빛으로 보이던 하늘이 저녁이 되자 파란 하늘이 되어 내려 앉는다.
파란 지붕...
파란 바다...
파란 하늘...
파란 바람...
그 곳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이십여일이 넘어간다.
지금도 어슴프레 저녁 하늘이 내려 앉고, 그 파아란 빛에 내 눈이 홀릴 때면 어김없이 그 곳이 떠오르곤 한다.
여행길에서 마음을 비울 때야말로 진정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다가올 수 있음을 알려줬던 곳.
지금껏 걸어왔던 길고 짧은 여행길, 때로는 아무것도 없어서 좋았던 여행들....
눈에 딱히 오랫동안 남을 풍경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일상적인 것 뿐이었지만....
가도가도 이어지는 것은 그냥 흔한 가로수이고, 그 모습이 그 모습같은 산들의 연속이었지만....
눈에 남은 것이라고는 파아란 하늘과 길게 이어지는 길 뿐이었지만....
때로는 아무 것도 없어서 아름다웠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는 길이었기에 더욱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늘 이 새벽에 깨어서 어느 낯선 길에 서있는 나를 상상하는지도 모르겠다.
bonus tip
무인찻집 "5월의 꽃" 안과 밖입니다.
thanks to
서귀포시 대정농협 무릉지점의 김윤우 지점장님!
예고없는 방문에도 불구하고 저희 부부에게 보내 주신 과분한 환대에 감사 드리며, 덕분에 이번 여행이 무척 풍요로웠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 인사 드립니다.
ebond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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