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젊은날의 초상Ⅲ

ebond 2007. 8. 14. 10:52

젊은날의 초상Ⅲ
(부제: 친구)

 

추억은 마치 바다 위에 흩어진 섬들처럼 내 머리 속을 떠다닌다. 나는 이제부터 기억의 노를 저어 차례 차례 그 섬들을 찾아가기로 한다.(영화 "친구"중에서)


1983년 새학기에 맞춰 실시된 교복자율화은 우리들 행동반경의 제약을 일순 완화시켜 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초등학교때부터 입은 교복은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계속 되었고, 이런 전차로 교복이 거추장스럽기도 하였지만 안 입었으면하는 그런 큰 소망도 없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까지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입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런참에 내가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시행된 교복자율화는 우리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덜자란 아이들이 다 자란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광주민주항쟁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불순한 의도로 수립된 신군부 독재정권은  혹세무민을 위해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교복두발 자유화 조치와 함께 스크린, 섹스, 스포츠라는 `3S` 정책들을 쏟아 내었는데, 당시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한 하수상하고 난데없는 국풍81축제와 프로야구 출범, 그리고 애마부인.뽕등을 위시한 숱한 에로물들이 솥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부산 중구 대청동 산복도로변에 위치한 우리학교인 덕원중학교는 영주동과의 경계에 있었고 같은 재단법인으로 덕원공고와 한 운동장을 같이 쓰고 있었고, 그 밑으로는 건국중,건국상고,남성여고가 위치하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화여상이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남자학교에서는 학교대 학교개념의 패싸움이 가끔 있었고, 산복도로변 삐알 학교 학생들의 패싸움은 당시 막 조성한 영주동의 민주공원(통상 대청공원이라 불림)에서 자주 일어나곤 하였는데, 지리적으로 인접한 여건상으로 인하였는지는 몰라도 우리학교와 건국중학교, 덕원공고와 건국상고 학생들 사이는 서로 앙숙인 견원지간이었다. 두 학교간 무슨 특별한 사유는 없었던 것 같고, 단지 같은 노선의 통학버스를 타다보니 아무래도 부대끼는 일이 많치 않았나 싶다.

 

한번은 우리학교 동급생인 학교 "통"(요즘 아이들은 "짱"이라 부르는 것 같은데 당시 우리땐 "통"이라고 불리웠다)인 김영민(가명)과 건국중학교 학교 "통"간의 일대일간 맞짱이 붙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우리들은 학교를 파하고 그 싸움판을 구경하러 속속 그곳에 몰려 들었다.
가죽장갑까지 갖춰 끼면서 시작한 그싸움의 결과는 우리학교 "통"의 승리로 돌아갔고, 그때만큼은 범생이 날라리 구분없이 축제분위기마냥 들떠 있었다.

 

당시 2학년인 학교통은 그 여세를 몰아 위계서열을 무시하고 울학교 3학년 학교통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그와의 대결에서도 승리함으로서 학년전체를 장악하였는데, 분위기는 그리 간단하질 않고 살얼음판 위를 걷듯 위태위태 하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그 부류의 3학년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호시탐탐 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식적 맞짱대결에서 3학년 통이 패한지라 3학년 선배들도 드러내놓고 우리 2학년들을 건들지는 않았다.
그러한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의 싸한 분위기에서 그러나 우리는 별탈없이 조용히 3학년으로 진급하였고, 선배들이 졸업함으로서 긴장감은 자연해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와 그 학교"통"은 같은 반이 되었다.

같은 동급생의 반친구라지만 우리들에게 있어 그 친구는 친구로서 쉽게 다가서지는 않았다.
기억하건데 당시 그친구는 호남형의 얼굴에 단단한 체격을 하고 있었고 또래의 우리들보다 훤칠 키가 컸었고, 째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또한 통 밑으로는 5~6명의 각반 통들이 따라 다녔고, 그 통을 비롯한 일부의 하급 통은 당시 우리학교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복싱부의 주장과 부원이기도 하였다.
내가 기억하건데 복싱부라고 해봐야 학교차원의 지원은 없었던지라, 전담코치도 없었고 샌드백 한개와 글러브 몇개등이 전부였다.
학교차원에서는 싸움등으로 말썽을 부리고 다니는 애들을 위한 최소한의 지도지원방안이었던 것 같다. 젊음의 표출과 일탈을 잠재우는 방편치고는 그리 썩 교육적이었다고는 보여지질 않는다.
선생님들은 그걸로서 계도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들은 학교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몰려가 담배를 피우기도 하였으며, 급기야 성에 안 찼는지 교실안 창가에서 버젓이 피우는데에 이르기도 하였다.
조용한 다수의 우리들에게 누가 오는지 안오는지 교실문앞에 서서 망을 보도록 지시하는 가운데...
그러나 그 누구도 이 부당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도 없었지만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 친구는 이미 우리 학생들에게 하나의 권력이었다. 아무도 대항 할 수 없는...
학생주임선생과의 동급정도 레벨의 아니 그 이상의 위치에 이미 군림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점심도시락을 제대로 싸오는 날이 없었으며, 점심시간때는 여기저기 학생들로부터 조금씩 밥과 반찬을 얻어 먹는게 일쑤였으며, 체육시간 있는 날에는 몰래 들어와 급우들의 도시락을 뒤져 먹는 일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일은 엄한 곳에서 터졌다.
요즈음의 사회일각에서 부는 기운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좋은 쪽으로던 아님 그 반대던지간에 1위와 1등, 즉 일인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그릇된 시기.질투에서 비롯한 열등감의 발로일 수도 있고, 자신만이 유일유이하여야 한다는 못난 영웅심 또는 못된 심사에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와 교문 및 운동장을 같이 쓰는 관계로(물론 경계는 없는 운동장이지만 우리들 사이에선 다들 건물끝선을 기준으로하여 암묵적. 묵시적으로 넘지 않는 선들을 지키고 있었다), 중고생이 운동장에 서로 섞이면 잘 구분되질 않았다.
이로인해 가끔 일부 우리 중학생들이 종종 고등학생들로부터 운동장 등지에서 군기를 잡히고 있는 광경들을 볼 수 있었는데, 방과후의 한날 이러한 때에 울학교 "통"이 개입되어 해산을 시키는 일이 발생 하였다.

그런데 그 고등학교 무리중 한명이 자신들의 학교통에게 그 내용을 알렸고, 어디선가 고등학교 통이 급히 달려와 울학교 통과의 일대결전을 벌리게 된다.
그러나 김영민은 제 아무리 중학교 통이라지만, 고등학교 통과의 나이차에 따른 엄연한 물리적 차이가 존재 하였는지, 아님 잔혹함의 표출로 인한 기선제압용이었는지는 몰라도 당시 학교 교문옆에는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 당시 모래사장 평탄 및 보수작업을 위해 모래를 한차 부어 놓았었는데 그곳에 삽이 한자루 꽂혀 있었고, 중학교 통이 그 삽으로 고등학교 통의 등짝을 찍어 버리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사건 이후로 학교에서 우린 그 친구의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었고 소식도 듣질 못하였다.
간혹 어디서 누가 봤더라는 소문은 있었으나,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지 못하였다.
이로인해 우리 중학교 학생들은 고등학생들과 마주치길 꺼려 대운동장에는 가능한한 나가질 않았고, 중학교 건물앞에는 소운동장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나가 놀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통의 부재로 인해 교내는 그밑 하수의 찌질이들로 인해 무질서 속 혼란이 가중되었다.
어느새 우리들은 그에게 길들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가져다 준 질서와 그가 있음으로 해서 타학교 학생들이 우리학교 학생들을 함부로 건들지 않은 평화가 일순 사라져 가 버린 것이다.
그만큼 길들여져 익숙함은 편하기도 하지만 매우 무섭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 친구는 나에게 유달리 잘 대해 주었다. 그 친구의 관심아래 아무도 날 건드리거나 나에게 짖궂게 구는 이들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당시 또래의 여중생을 사귀고 있었고, 어디서 어떻게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 친구는 한날 나에게 전혀 그답지않게 수줍어 하며, 내게 편지를 대필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난 부드럽게 대하는 그의 부탁에도 거절하지 못하였다.(적어도 그당시에는...)
그리고 왜 이런 것도 있질 않은가? '어떻게 해야 더 올 바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나에게 이익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듯이...

 

답장이 오면 그에대한 재답장을 해야 했기에, 그 친구는 편지가 오면 나에게 제일 먼저 달려와 보여주곤 하였고, 난 그 친구도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였다. 좀체 잇몸을 드러내는 웃음을 안 보였기에...
이런 전차로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엄포를 놓았는지는 몰라도 장난이 심한 친구들도 나에게는 사소한 시시비비조차도 걸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난 몰랐다. 이로인해 친구들이 점점 날 멀리하고, 그로인해 외로운 섬이 되어가는 것을...

이즈음 1학년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다른반 친구로부터 난 충격적 얘길 듣게 되었다.
니가 왜 그런 애들과 어울리는지 모르겠다는...
그런 애들과 노는 니모습에 실망했다는...
친구들이 그래서 니랑 잘 안 어울릴라고 한다는 것을...

충격이었다.
난 그 충격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와 온종일 고열에 시달려야했다.
난 단지 학교 통의 부탁을 거절 못해 연애편질 대신 써준것 뿐이었고, 편지를 쓰기위해선 그들의 얘길 경청해줘야 했고, 이로인해 쉬는시간 그들과 같이 있는 내 모습을 친구들은 자주 보게되고...
이때 소시민적 평범한 친구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내가 그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였고, 쉽게 말해 그런 애들과 노가리까는 내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이질 않았던 것이었다.

하긴 그랬다. 쉬는 시간 학교 통을 위시한 각반의 통인 그런류의 아해들이 내 주변에 몰려와 히히닥 거리는 모습을 보는 그네들의 심사가 어떠했을지는 알 것도 같았다.

그렇찮아도 그즈음의 나도 다른반 통까지 더해지기 시작한 그들의 부탁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고 이로인해 짜증만땅의 싯점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기서 그기인 연애편지 소재의 고갈도 한몫 하였을테고...
내 사적자치 고유영역인 시간들을 그곳에 헛되이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혼을 팔아 먹고 있다는 내안의 내가 울부짖기도 하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 그로인해 나의 베프(베스트프랜드)들을 잃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해서 난 친구의 충언에 따른 자각과 자성으로 인해 급기야 용기를 내어 난 "통"에게 더이상의 편지대필 거부와 다시는 나한테 말걸지 말 것이며, 나도 이젠 더이상 너희들 하고는 안 어울릴 것이다라는 폭탄선언을 하게 된다.

 

나는 보았다. 그순간 멍한 표정으로 매우 황당해하는 그친구의 모습을...
그러나 더이상 내 알 바가 아니었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 친구의 눈길을 외면했다. 아니 똑바로 쳐다보질 못하였다는게 정확할게다. 말하고 나니 두려움이 엄습해 왔음으로...

친구가 무섭게 느껴지면... 그건 더이상 친구가 아니다.

그날 그일이후 정말로 그 친구는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으며, 나도 가능한한 그와 눈도 마주치질 않고 부딪히질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사단은 정확히 일주일여 뒤 일요일 낮에 일어났다.

 

다른학교의 낯선 애들 다섯명이 우리집 앞으로 날 찾으러 왔고, 불려 나간 나에게 그 친구들은 김영민 때문에 잠시 얘기할게 있으니 따라오라 하였고, 난 그들의 위세에 눌려 묵묵히 땅만 바라보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포동 왕자극장 앞의 한 인적드문 골목이었고, 그골목은 건물과 건물 담장사이에 난 막다른 좁다란 틈새였다. 그러나 틈새라기엔 넓은 골목이었다.
난 그 거리 앞을 그리 많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골목이 있었는지는 그날 처음 알았고 후일 그곳이 일명 아리랑골목이라고 불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당도한 그들은 일순 태도가 돌변하여 날 몰아 부쳤으며, 자기들과 친한 친구인 김영민에게 아무것도 아닌 내가 심한 말로 모욕을 주었다며, 그로인해 상당히 격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얘기는 그랬다.(지면상 물론 말을 많이 순화시켰음을 이해해주시길)
"니가 김영민에게 그러그러하고~ 여차저차한 얘길 한 사실이 있느냐?"
"그렇다."
"시방새 니놈이 뭔데 니가 그리도 잘났나? 완죤 겁대가리 상실했네..."
"아니 그게 아니고, 너무 내 시간이 없고 공부에도 신경써야하고, 그리고..."
난 말을 맺질 못했다. 그들의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얼굴표정들을 보았음으로 인해...
"이새끼 아주 건방진 새끼네.."
"고개들어"
내가 고개를 들자 여기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 들었다.
퍽 퍽 퍽 아~ 욱~ 억~

정말 내 나고선 그리 심하게 맞아보긴 처음이었다.

옆구리와 복부에 주먹을 들어 왔을 땐 숨이 컥컥 막히는 고통을 맛 보았으며, 또한 이들이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난 떨고 있었고, 스스로의 무력함에 좌절했다.

몇분간 지속된 그들의 폭력앞에 난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고, 이런 소란스러움으로 인해 화장실 창문크기 정도의 건물뒷편 창문틈으로 장년층의 어른이 고개를 내 밀었고, 난 그가 구세주인냥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애절한 구원의 눈길을 구했으나, 그치는 목을 빼꼼히 내 민 상태에서 "그곳에서 시끄럽게 싸우지 말고 싸울려면 다른데 가서 싸워라" 는 황망한 말을 남기고 고개를 감추는 그를 보며, 위선적 어른에 대한 경멸을 느꼈다.
제기럴 눈으로 보고도...
여럿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내가 맞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싸우지 말라니...
그 광경은 누가 봐도 상황판단이 퍼떡 될낀데...씨펄.

그러나 낯선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은 나에 대한 폭력을 거두었고 다음에 다시한번 안 좋은 얘기 들리면 더이상 가만두질 않겠다는 말을 하며 돌아서는 그들을 보며, 하마터면 이만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할 뻔 하였다.
난 그들에게 끽소리도 못하는 못난 놈이었다.

 

두려움이 걷히자 고통이 다가왔다.
난 그들이 떠나고도 한참을 그곳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숨막히는 고통과 통증속에서 난 좀체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날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야 했다. 쪽팔리는 일이기도 하였지만 발설후 또 어떤 위해가 가하여 질지 몰랐기에...
하지만 매일매일 아무런 일도 없은 채하고, 학교 통의 모습을 본다는 사실은 또한 그 얼마나 큰 고통이랴...

그러나 학교통은 이러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또한 내색 하지 않았고, 나에게 더이상 아무런 위해도 아무런 관심도 갖질 않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퍽이나 다행이었다.

정말 모를 일이었고 혼란스러웠다.
이 친구가 사주를 했는 것인지 아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고 따지고도 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다.

이러던 와중 어느 초가을날 그 친구는 대형사고를 쳤고, 학교에서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림으로 인해서 난 그 친구에게서 그 내용의 본말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졸업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내 격정의 중학교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학교는 학생들을 진정으로 계도하지 못하였고 바른길로도 인도하지도 못하였다.
기술선생님은 학생들이 잘못하면(잘못이라는게 달리 잘못이 아니라 이런거였다. 지난달보다 시험성적이 내려가면 내려간 것 자체가 잘못인 셈이었다), 바지를 벗게하여 항상 지니고 다녀 손때묻어 반질반질한 걸상 넓적나무를 양동이에 담긴 물을 뭍혀 허벅지쪽을 내려간 점수만큼 피멍이 들도록 때렸었고, 난 이때 피멍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것임을 이때 알았다.
수학선생님은 길다란 밀대걸레 나무봉을 산신령 지팡이처럼 갖고 다녔었는데, 엎드려뻗혀 한 상태에서 그걸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려쳤었고,
미술선생님은 항상 스님들이 쓰시는 목탁 방망이를 호주머니 안쪽에 지니고 다니며 그걸로 학생들의 머리를 목탁인냥 두들겼었다.
학생주임이자 사회선생님은 손바닥으로 학생들의 뺨만을 고집하였는데 우리들에게 10초를 헤알리게하고선 매일 자신의 기록갱신을 자랑하며 그에 힘썼다.
손바닥으로 학생의 뺨을 타타타타하며 연타를 치시며 10을 헤아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결정타를 날리는 방식이었다.
어제는 10초에 35대 때렸는데, 오늘은 10초에 40대... 내일은 10초에 45대에 도전한다는 이런식이었으며 그에 뿌듯해하였다.
유일한 여선생인 물상선생님은 남선생님들의 이런 가학성에 자극을 받아 동화되셨는지 30센티 자로 손등 및 손가락을 때렸섰다.
영어선생님은 학생들이 껌씹는걸 매우 못마땅해 하였고, 행여 껌씹다가 걸린 학생은 그날로 이발관에 가 백보로 머리를 쳐야 했다.
씹던 껌을 뱉게하여 쭉쭉 늘려가며 머리에 덕지덕지 붙혔음으로...

선생 학생 할 것없이 폭력이 난무하였고 인권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도 죄책감도 없는 상실의시대였다.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수시로 이루워지는 생활검열은 또 어떠하랴...
학교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희망이고 위안이 되지 못하였다.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구타하는 선생과 친구들을 밑에 종 부리듯하는 "통"일당.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선생들.
지금 학교선생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를 느낄 정도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지만 당시의 학교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위와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 했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보여지듯 이러한 모습들은 당시의 어두운 시대상이 상당히 투영되어 있는 장면들이며 후반부 분노하게 되는 극중 현수의 모습은 단순히 열이 받아서가 아닌, 이런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보는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각설하고 그럴리는 없겠지만 이 글을 만약, 날 유난히 좋아하셨던 국어선생님이 보신다면 상당히 섭해 하실런지도 모른다.
인자하신 국어선생님과 도덕선생님등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많으셨기에...

 

2006년도 봄 어느날...
몇 안되는 내 친한 친구중 한명인 중학교 동기 윤보경(여자아님. 동생은 소영...역시나 여자아님ㅋ)은 조선공학을 전공한 주특기를 살려 부산의 한 조선관련업체에 근무하는데 우연히 지하철에서 학교통을 만나게 된다.

한두 정거장 상간의 길지 않은 찰나의 만남속에서 통은 보경이에게 ebond의 안부와 근황을 묻더란다.
하여 내 근황을 알려 주었고 핸드폰번호를 알켜 주었단다.
그러데 이 친구 역시 정신없는 삶을 사는지 곧 학교통과의 만남을 잊어버렸고,

따사로운 봄날 난 뜬금없이 잊고 지내던 그 친구로부터의 전화 한통을 받게된다.

"여보세요"
"예 ebond입니다"
"저어기 ebond씨가 맞는지요?"
"예 제가 ebond인데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ebond! 내다. 영민이...김영민이..."
"김.영.민... 누구신지...잘..."
"와 내 몰겠나. 중학교 3학년때...우리 같은반 친구아이가"
"어어어 통! 그래 기억난다"
"쨔식 치와뿌라. 통은 무슨 통..."
기쁨이 묻어나는 약간 목소리가 들뜬듯한 그 친구는 내가 통이라고 한 그 말에 적잖이 겸연쩍어 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20년이 훨신 넘은 옛날적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이내 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별안간 이 친구가 어떻게 내게 전화를 걸어 온건지...
무슨 일인지 그 저의가 궁금해졌다.

"근데 니 내 핸폰번호 우째 알았노? 글구 어떻게 지냈고 요새 모하노?"
"야 천천히 물어봐라. 아 글구 니 핸폰번호...와.. 보경이가 말 안해주더나?
갸캉니캉 억수로 친했다 아이가...나 그정도는 안데이..."
"몇일전에 남포동 지하철안에서 보경일 안 만났나...그래가꼬 내 니 소식 들었다아이가.

와 근데 니 억수로 출세했네...좋은 직장에도 다니고..."
"짜식 무슨..."
그 친구 특유의 너스레라 짐짓 생각하며, 난 단지 빨리 그 친구의 속내가 궁금하였다.

"아 그렇나 근데 우짠 일이고"
"아 다른기 아니고 니 농협에서 무슨일 보는데?"
"어 대출업무 담당한다 아이가 근데 와?"
"와 억수로 끝발 시겠네..."
난 이네 괜히 대출업무를 본단고 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밀려 왔다.
왜 한번씩은 경험하셨겠지만 일반인들은 농협하면 은행정도로만 생각하고, 이런전차로 급전을 부탁하거나 혹은 무슨 대출을 부탁한다던지...왜 그런일들이 왕왕 있질 않은가?
하여 난 그 짧은순간에도 위와 같은 일말의 걱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속내를 들킨 것처럼 그 친구는 말을 이었다.

"아 딴기 아니고 그라면 너거 사무실에 경비업체 어디꺼 쓰는데?
"..."
"뭐 세이콤 캡스 이런거 있다 아이가?"
"어어 세콤이다. 근데 와 그라노?"
"어어 내가 부산의 00캅에 댕긴다 아이가? 그래서 친구 니가 농협에 댕긴다카니 내가 하는 일 하고도 관련이 안있나..뭐 그래서 계약기간 이런거 끝났으면 우리회사꺼로 바까주면 안되겠나 해서... 은행들 울회사꺼 마니한다 글구 유지비가 딴데보다 마니 싸다아이가..."
"어어 그렇나. 야 니도 좋은데 다니네 뭐. 근데 우짜노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글구 그런건 본점에서 관리하게 땜에 내가 있는 지점 이런되선 안된다."
"그렇나 그라면 계약기간이 언제 끝나는지 정도는 함 알아봐 도? 친구 니도 신경 쫌 써주고..."
"어어 알겠다."
"내 전화번호는 016-0000-0000이다. 하나 적어놔라"
"아이다 안 그래도 여기 번호 찍힌다 아이가"
"아 그렇체 그리고 뭐 이런거 떠나서 야 쨔식 진짜로 반갑고 보고싶다 친구야"
"어어 그래...나도"
"내 담에 다시 함 전화하께 기회되면 만나 쐬주한잔하고. 친구야 잘 있어래이..."
"어어 그래 친구야 니도..."

 

그 친구와 전화를 끊고선 난 그 친구를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지냈는지 그동안 뭘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고, 정상적 사회인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것

같아 대견스럽기도 하였으나, 아픈 과거가 함께 오버랩 되어졌다.

난 보경이에게 전활 해 따져 물었다.

"보경이가?"
"어 ebond 우짠 일이고"
"딴게 아니고 조금전에 말이다. 우리중학교 때 통 안있나 김영민이..."
"어어 그래"
"갸한테 전화가 왔데... 근데 니가 갸 만났나. 그래가꼬 내 전화번호 갈켜 주띠나?"
"어어 그래. 몇일전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나는 걜 못 알아 봤는데 갸가 내를 알아보고

아는체를 안하나"
"그래가꼬 얘기도중 니 소식 묻데...그래서 니 김해 살고 농협댕긴다 안�나"
"그러디만은 니 전화번호 물어보데 해서 니 전화번호 안 갈켜줬나"
"그런데 와. 갸가 뭐라 카던데"
"아니 모할라꼬 가르켜..."라고 말을 하다가 난 말을 흐리고 말았다.
썩 탐탁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릴적 친구한테 친구 전화번호 가르켜 준 것에 대해서 따지고

보면 궂이 이 친구를 책망할 일만은 아니였기에...

 

그날 그런일이 있은 후 이내 자연스럽게 그 친구의 일은 잊혀져 갔고, 난 일상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로부터 잊혀져 간다는 것은... 잊혀진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다.
프랑스 의 한 시인은 일찍이 " 버려진여자, 떠도는 여자, 죽은 여자들 보다도 '잊혀진 여자'가 가장 불쌍하다"고 노래했는데, 그것은 비단 여인네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난 그즈음 지점 대부계에서 본점 총무계로 업무분장 되었고, 그러던와중 반년만에 그 친구의 전화를 다시금 받게된다.

휴대폰 통화목록에 있다 자연스레 밀려 삭제된 기억하지 못하는 그 친구의 전화가...

"ebond야. 나 김영민이다."
"어어 그래 오랜만이다."
"친구야 잘 있었제. 그리고 안있나 내 저번에 부탁한거..."
"어 뭐였드라."
"와 그거 안있나 세콤 계약기간 알아봐 달라고 핸거..."
"아아 그래 그래. 어 내가 쪼매 바빠서 못 알아봤다."
"니 지금은 뭐보는데?"
"어 본점에 총무일본다."
"그렇나. 그라면 더 잘됐네. 친구 니가 힘 좀 써주면 안되나?"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그런 것은 내 위에서 다 하는긴데..."
"글구 여기는 좁은 지역이라 다 혈연 지연 학연이런걸로 다 묶여 있어 바꾸기 어렵다.
글구 세콤이 뭘 잘 못한다던지 이런게 있으면 모르는데 지금까지 별탈없이 잘하고 있고, 또 우리지역에 농협들은 거진 다 세콤을 쓴다."
난 이렇게나마 궁색한 변명, 즉 바꿀수 없음을 은근히 강조하며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 놓았다. 또한 동인들께서도 아시겠지만 내가 바꾸고자 한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는 부분도 사실 아니질 않는가...
"친구야 그라먼 내 니한테 함 찾아가보께."
"아이다. 올 필요없다." 난 정색을 하며 올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아까도 내가 안 얘기하더나 내는 아무런 힘이 없다꼬..."
"그래서 니가 온다고해도 마 아무런 소용이 없다아이가."

난 이렇게 그의 방문을 단절시키려 부단히 노력 했다.
다음에 함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나서 곰곰 생각해보니, 그냥 이러고 저런걸 떠나서 얼굴이나 함 보자며, 점심이나 같이 함 먹자며, 그래 온나 할 수 도 있었을 것인데 너무 모질진 않았나 생각되어졌다.

경상도의 억센 사투리는 여전하였지만 사회인으로서 많이 유해진 그의 목소리가 생경하기도 하였지만 한편 열심히 잘 사는 것 같아 고맙고 대견하기도 하였다.
가만 따지고보면 그 친구는 나에게 별시리 해꼬지 한 것은 없었다.

다만 풀리지 않는 그 날의 그 사건을 빼면...
하지만 지금에사 생각해보면 난 그들로부터 그날 몰매를 맞음으로 인해서 나름대로 그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기에 그 댓가로선 상응하는 값어치를 치루웠다.
만일 그런 단절이 없었다면 또 내 인생이 어떻게 바꼈을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인생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미래를 알 수가 없기에...인생에 있어 상상과 추측이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기도하다.
우리네 삶들은 미래를 알 수가 없기에 정진 또 정진할 뿐이다.

난 지금도 그 친구의 연락처를 모른다. 메모로도 휴대폰 저장으로도 안 남겨 놓았기에...
물론 알려고 조금만 노력하면 알아낼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 만약 다음에 또 그 친구의 전화가 온다면 내 기꺼이 반가이 대하리라고 다짐 또 다짐해본다.
결혼은 했는지...애는 몇인지...가만 생각해 보니 난 오래된 친구에게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조차 묻질 않았던 것 같다.

 

친구야! 그래 우린 친구아이가~
오늘 문득, 내...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 친구... 당시 이용의 "바람이려오"를 지대 참 잘 불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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