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의 초상Ⅱ
(부제 : 스물한살의 비망록)
어떤 작가는 스무살이 지나면 스물하나가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살 그 이후가 온다고...했는데, 아쉽게도 나에겐 스물한살이 왔다.
추억은 불현듯 떠오르며 그 추억이 떠오를때쯤 사라져 간다. 나의 청춘도...
#1
개인적으로 좋아서 따라 부르는 노래들이 있다.
즉 나에게 있어 18번,19번이라는 얘기다.
허나 이런 노래들은 나의 독특한 취향 때문인지, 아님 유별스러움 때문인지 몰라도 노래연습장(방)엘 가면 없다.
울나라에서 전화번호부 다음으로 등장인물이 가장 많이 나온다는 책인 그 노래방 책에서 말이다.
일단 어떤 노래들인지 함 얘기해보자.
18번: 스물한살의 비망록(스물하나)
19번: 애고 도솔천아(정태춘)
하여 난 노래방엘 가면 부르고 싶어도 18번, 19번을 못 부른다.(예전에는 간혹 있는 집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예 없다)
썩 괜찮은 노래실력 같으면야 무반주로도 한껏 뽐내보아도 관계 없을런지 모르나...
내 일천한 노래실력으론 그럴수가 없다.
20번에서 25번까지도 역시나 목록에서 찾을 수 없고, 26번부터 30번정도 까지는 따라 부르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내 스스로의 자기검열하에 제외되고, 그런연유로 나에겐 부를수 있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잘 부르는 또는 잘 부를수 있는 노래가 없다는 말쌈이다.
마지못해 부른다면 분위기 깨기가 어색할 때 부르는 벽오동(투코리언즈)과 분위기 잡아도 괜찮은지 눈치 봐가며 부르는 윤종신의 오래전 그날(그것도 심의반려된 당초 원가사로) 정도가 있다.
서두가 길었는데
뭔 얘길를 할려다 서론이 길었나하면 내 스무살을 얘기하려다 보니 갑자기 불현듯 서든리 내 18번인 스물한살의 비망록이 조건반사처럼 떠올랐던 것이다.
#2
스물한살!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거쳐야 되는 과정인 군대를 가게된다.
신검 당시 내 본적지는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 서면 대정리로 되어 있었고, 이로인해 난 신검을 받으러 남해행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시 난 키에 비해 다소 왜소한(마른) 체형이었으며, 이로 인했는지 몰라도 신검 마지막 최종판정시 군의관이 친절하게도 현역갈래 방위갈래 물어봐 줬었고, 난 그때 왠지방위로는 가기가 싫어 현역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돌이켜보면 당시 난 막역하게 방위로 간다는게 속된 말로 쪽 팔렸다)
자.타의에 의해서던 방위로 군복무하신분께서는 이점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그당시 만구 내혼자만의 생각임으로...
#3
어릴적 우리집은 전편(젊은날의 초상) 글에서 밝혔듯이 부산 충무동에 살았고, 당시 아버지는 충무동 시장통의 조그만 가게에서 간장.고추장.된장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식품상회를 운영하셨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선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않으신체 농촌생활을하다 보장없는 그생활에 염증을 느껴셨던지 할아버지 몰래 곳간의 쌀가마니를 빼돌려 마련한 돈으로 고향 남해를 등지고 무작정 부산으로 가출하셨다고 한다.
이후 몇군데 점원생활을 거쳐 충무동 시장통에서 식품상회를 차렸고, 주거래처는 남포동 광복동 등지의 식당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자전차(짐자전거는 자전거 보다는 자전차라고 발음해야 제맛이 난다)를 타고서 아침에 이들 식당에 납품을 하시고, 저녁에는 식당을 돌며 수금을 다녀셨는데, 난 그때 아버지 자전차 뒤에 올라타고 가끔 그길을 따라 나섰고 식당 아주머니들은 김씨집 아들 왔네하시며 정겹게 날 안아주곤 하셨다.(몸에 밴 음식냄새로 인해 사실 난 곤욕이었다)
당시 따라 나섰던 식당들은 명멸을 거듭후 지금은 거진 다 사라져 잘 생각나진 않지만, 남포동 별들의고향 나이트 정문 앞의 순두부전문인 "골목집" 과 횟국수 전문으로 유명한 "할매집"은 아직까정 남아 유이하게 떠올려지는 기억의 전부다.
당시 아버지 가게는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일반인 상대의 소매보다는 요식업체를 상대로 한 도매가 주였고, 당시 간장은 20L들이 말통에 담아져 나왔는데(물론 지금도 업소용은 말통으로 나오는데 지금의 말통하고는 그 용량크기와 두께자체가 틀리다), 가게뒷편으로는 창고겸 마당이 있었고, 공장에서 간장을 가득 실은 차가 오면 아버지는 간장통을 마당에 쭉 도열시켜 놓은 가운데 이들 말통에서 간장을 한 1L정도씩은 빼셨던 것 같다.
하여 고만큼의 빈자리는 수도꼭지에 호수를 연결하여 물을 채워 넣어셨는데, 아버지께서는 그 물 채우는 일을 도와달라며 나에게 시키시기도 하셨다.
지금에사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께서도 그게 죄인줄 모르고 하셨을거라고 궁색하게나마 대변해 본다.
왜 예전 생맥주집에서 생맥주통에 물을 타던 것 처럼...(요즘에는 없겠지만서도...)
아무튼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이점 널리 양해를 구한다. 쩝. OTL.
당신께서는 그런대로 그 분야에서는 수완이 계셨는지 장사는 꽤나 잘 되셨던 것 같다.
적어도 노름과 도박에 빠져 들기전까지는 말이다.
노름을 치시면 가정을 소홀히한체 박으로 치셨던 것 같다.
당시 아버진 시대상 거진의 아버지들이 그러했겠지만 매우 가부장적인 분이셨고, 어머니께서는 또한 거개의 어머니들이 그러하셨듯 전형적인 옛날 여인네로 아버지라는 그 높은 권위에 도전하시질 못하셨다.
1981년도초 도박에 빠진 대다수의 삶들이 그러하듯 아버지는 가산을 탕진하시고 아무 연고도 없던 이곳 김해로 모든걸 접고 도망쳐 오다시피 들어오시게 된다.
내가 막 중학교에 진학하고 얼마쯤 안 있었서 였을 때였는데, 난 전학을 가기도 싫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었으며, 더더구나 당시로선 김해 촌구석으로 이사를 간다는 그자체가 너무나 싫었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헤어짐은 그 얼마나 슬픈 일이더냐...
이에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렸고, 이런 연유로 난 가족과 떨어져 홀로 부산에 남게 되었고, 당시 중앙동 전매청 인근에서 우유대리점을 운영하시던 작은아버지댁에서 기거를 하며 학교를 다니게 된다.
내 위로는 네살터울의 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는 역시나 네살터울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우애 깊던 우리 형제들은 헤어짐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4
88년도초 입영통지서를 받고선 난 두세달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방황하던 카오스의 시기였던 관계로 머리도 식훌겸 부모형제가 있는 김해로 짐을 싸 들어오게 된다.
당시로선 모든게 허하고 무한 시기였다.
스물이되면 모든것이 순리대로 다 풀리리라 생각되던 어릴적의 그 환상이 보기좋게 깨어지던 그 순간부터 고통은 시작되었고,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너무 커 무언가를 도전해볼 용기조차 사그라 들어가는 이 감정을 누구에게 말해야하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한 시기였다.
친구를 만나 웃고 떠들면서도 웃는 그 소리만큼 슬픔의 언저리는 커져 갔고, 무언가를 먹고 먹어도 허기진 배가 채워지지 않은 것처럼 감정의 고독은 심해져만가는...
음악과 책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인 것 처럼 그 속에 더 깊이 빠져 들었고, 빠져 들면 들 수록 외로움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사람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하지만 과연 숲을 둘러본다고해서 만사형통인것은 아닐테다.
나무가 개개인의 인간이라면 숲은 그 인간들이 모여만든 사회이며 나라일텐데..
그럼 숲을보란 소린 결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생각해서 자신의 설 자리를 만들어라는 소리는 아닐지?
그래서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 내 방을 만들면 그 다음은 어쩌라는 것일까?
그 방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 속에 갇혀 버린다면 어쩔 것인가?
안식이 아닌 자신의 숨을 조여오는 공간이라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그 방속에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야 할 많은 이들의 삶은 어떨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나는 나조차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나에게조차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나 있음의 까닭이 무엇인지, 그 어느 힘이 지금 내 나이까지 나를 키워 여기에 이르게 했는지... 그런 의문부호만이 내 머리속을 맴돌고 있었다.
#5
어머니는 예전 부산에 살때 김치를 직접 담아 파시기도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생각해도 어머니의 김치 담그는 솜씨는 일품이셨다. 몇해전 돌아가신 고모께서는 그때까지도 늘상으로 어머니가 담가주시는 김치만을 고집하셨을 정도였다.
즉, 음식솜씨가 좋으셨고 그로인해 어머니는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김해로 들어와 지금은 사라진 안동 한일합성 담벼락 끝나는 집에서 인근 공장사람들을 상대로 가게 딸린 그집에서 함바집풍의 식당을 운영하셨고, 막걸리(동동주)도 직접 담아 파셨는데 그 맛이 좋다고 인근 공장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을 정도였고, 이로인해 동동주를 먹으러 오는 술손님도 적잖아 있었다.
우리집 인근에는 도시화 바람을 타고 소규모 영세공장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었고, 구내식당이 없는 탓에 두세곳의 회사에서 우리집에 정기적으로 점심을 대 먹었다.(물론 야근 있는 날은 저녁 및 다음날 아침까지 였으니 삼시세끼라고해도 무방하리다)
난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에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면 딱히 할 일이 없었는지라, 주종불문의 음주습성마냥 분야를 가리지 않은 잡독성으로 독서삼매경에 빠져 들었고, 하여 난 그기간에 걸신들린듯 무진장 책을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지금 직장생활하며 읽은 책보다 그 기간에 읽은 책들이 필시 더 많으리라.
아무튼 책이 고팠던 시기였다.
도와 달라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내가 와서 보니 점심시간만큼은 두분이 무척 바쁘셨고, 하여 바쁜 점심시간 만큼은 부모님을 외면하지 못하였고, 난 점심상 차리고 치우는 일을 도와 드려야 했다.
난 지금도 눈썰미가 없다.
한번 간 길도 잘 기억하질 못하고 다음번에 찾았을 때 헤매이기도 한다.
눈썰미는 내 1.5의 시력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6
어느날부터인지 장난전화가 집으로 걸려오기 시작했다.
식구들이 받으면 전화를 끊어버리는 전화가 하루에도 몇통씩 걸려오는 거다.
요즘말로 짜증 지대다.
허나 내가 받으면 바로 끊지는 않았다.
수화기를 한동안 가만 들고 있다가 끊는거다.
난 화를 낼 줄 모른다.(물론 요즘은 안 그렇지만...직장생활 오래하다보니...)
살아가면서 화를 한번도 안낸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속으로 삭이는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뭐 인내심이 대단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띠리링. 전화가 온다.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난 이렇게 말을 하지만 상대방측에선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집 전화기에 이상이 생겼나...
덜그닥. 삐삐삐....
상대방에서 수화기를 내려 놓는다.
이런 전화가 하루 서너번씩하여 그후로도 일주일정도 지속되었다.
띠리링. 전화가 온다.
수화기를 든다. 역시나 아무런 말이 없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니 전화를 거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오늘따라 상대편에서 오래도록 전화를 들고 있고, 나역시 내 인내심의 한계나 알아볼까 싶어 아무말없이 들고 있었다.
수화기너머 휴하며 가녀린 여자의 한숨소리가 들려오더니.
"저기요~ "하며 말을 건넨다.
"예"
상대편에서 더이상 운을 띄우질 않는다.
궁금증이 확 밀려온다.
"여보세요. 말씀을 하세요."
"...."
"저기요 저 모르시겠어요?"
"예 잘 모르겠는데요."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누구지? 예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여자인가?...
내 일천한 연애경력에 알고 지냈다면 모를리가 없는데...
"저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
"저는 그쪽을 잘 알고 있는데... 이름이 이비온뒤씨죠?"
이런 젠장 무슨 스무고개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아신다는 말씀이죠?"
"..."
"저는 늘 그쪽을 보는데요."
아! 궁금해 죽겠네...
"오늘저녁 시간 좀 있으세요?"
"네에~ 무슨..."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길래 나를 안다는 것이며, 어떤 의도로 오늘저녁 시간이 있느냐고 물어 오는건지...머리 아퍼~
"우리 한번 만났으면 해서요."
"왜요. 무슨 일인신데요?"
"...."
저쪽에서 말이 없으니 답답해진다. 하여 난 잠시간의 갈등을 접고 만나자고한다.
"아 그래요. 만나죠..."
가만 생각하니 내 딴에도 궂이 튕굴 이유도 없었다. 묘령의 여인네가 만나자는 게 썩 결코 기분 좋은, 좋아해야 할 일만은 아니였지만. 딱히 마다할 거절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또한 그때쯤 내 궁금증이 최고조로 상승해서이기도하다.
"그러면 어떻게 만나죠? 저는 그쪽을 모르는데..." 내가 물었다.
"제가 그쪽을 아니깐 상관 없어요." 라고 통통거리듯 명쾌하게 답한다.
"네~에 그렇군요."
"서면 아시죠?"
"예"
"그쪽 어떻게 괜찮겠어요?"
"네~에 관계없어요."
"그럼 서면 천우장 앞 00커피�에서 우리 7시에 만나요?"
00으로 표시한건 상호가 기억 안나기 때문이다. 뭐 이 나이에 감출게 뭐 있다구 ^^
"알겠어요. 그럼 그기서 뵙도록 하죠."
떨그덕.
#7
어슴프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서면의 거리는 화려한 네온싸인에 묻혀 시계가 없다면 그 시간을 가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물원의 "거리에서"와 공일오비의 "텅빈거리에서"라는 노래가 이때는 대세였는 것 같다.
슬픔이 베여있는 김광석의 우울한 목소리와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윤종신의 아름다운 미성을 온종일 들을 수 있었음으로...
시각을 맞춰 커피�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피�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며, 난 우두커니 서 있었다.(아니 그럴수 밖에 없질 않는가)
그러나 이내 여기예요... 하며 손을 드는 여인을 볼 수 있었고, 난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다가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 여인은 보통정도의 여자 키에 보통정도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기사 당시 시대상이 유달리 보통사람임을 강조하던 시기였고, 너도 나도 보통사람임을 자청하던 때였는데, 그들과 달리 정작 그사람이 보통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보통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하듯, 난 보통사람의 보통얼굴인 그녀가 누군인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역시 시력은 기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아직까지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라고 다소 삐친듯 바투 다가 앉으며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난감하다. 기억이 날둥말둥 정말 모르겠다.
"어디서 뵌 것도 같지만, 저 죄송하지만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랬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지만 기억이 떠올려지질 않았다.
그게 보통사람의 특징이 아닌가?
어디서 본 것도 같은...
마주친 적이 있는 것도 같은 ...
그후 학사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눠 본 결과 내용인즉슨 이랬다.
내가 낙향(?)하여, 집에서 푸~욱 쉬고 있을 때 점심시간에 어머니가 너무 바쁘셔 도와줬다질 않은가...
그때 그여인은 점심을 대 먹는 회사 중 한 곳의 경리사원이었고, 첫눈에 반해서 쭉 날 지켰봐 왔다는 것이다.(결코 제 잘남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닌데 쓰고보니 자랑처럼 되 버렸다...속이 거북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길^^)
그녀는 그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이 회사에 취직했으며, 이로인해 어머니와는 친하게 지내섰었고...
어느날부터 내가 보이고 그래서 이름과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등을 물어 보았었단다.
지금와서 고백하건데 그 여인에겐 참으로 미안하고도 죄송한 일이지만 별로 난 그 여인에게서 관심이 없었다.
이미 만난 그순간 나의 증폭된 궁금증은 다 해소 되었으므로...
또한 이실직고하자면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왜 세상의 모든 것(일)들은 다 취향의 선택이다고 하질 않던가?
그러나 딱히 내 좋다고 만나자 하는데 거절할...마다할 이유도 느끼질 못하였다.
앞서 밝혔듯이 난 군 입대를 준비중인 예비 군바리였고, 다들 이루워 질 수 없다는 그슬프도록 아름다운 첫사랑과도 막 이별을 했던 참이라, 이래저래 시간만 죽여가고 있는 처지에서는 더더구나...
하여 그후로 입대시까지 그녀와의 만남은 간헐적으로 수차에 걸쳐 계속 되었고, 내가 첫사랑의 그녀에게서 집착 하였듯이, 그녀는 나에게 집착하는 홍상수식 "생활의 발견"을 하게된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그러나 헤어짐에는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다.
#8
사람의 마음이란게 참 우습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라는 옛 유행가 가사가 있듯
당시 그녀를 만나 헤어지고나면 다음 만남시까지 그리워 해본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만나면 감흥없이 시들했다.(솔직히 지금은 뭘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하다)
난 시니컬한 미소를 띄우며 퉁명스럽게 자조적 얘길 내 뱉었고(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던 아무생각없이 말을 했기에 내뱉은게 맞다), 그녀는 뭐가 좋은지 나만 바라보면 치약거품을 물고 있듯 천진스럽게 꺄르륵 웃었다.
나의 슬퍼보이는 눈이 사랑스럽다나 뭐라나...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여 정녕 맘에 두고 있는 사람한테는 내성적인 성격탓에 우물쭈물 말도 못하면서, 이상하리만치 그녀 앞에서는 달변가마냥 말하는 생경맞은 내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정말 이상도 하지...
#9
군대 입대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입대일은 쌍팔년도 8월 2일로, 88올림픽 개최를 앞 둔 싯점이라 전국민의 화제와 관심사는 올림픽에 관련된 얘기들 뿐이었다.
니미럴 젠장... 내가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친구녀석 한명이 나랑 입대장소와 날짜가 똑같아 같이 가게 되었는데, 방학을 맞아 친구 두놈이 우릴 환송한다고 그 먼 강원도 춘천까지 동행하게 된다.(쨔식들 고맙게도시리...)
7월31일 일요일 아침 난 부모님께 큰절하고, 부산역까지 배웅 나가신다는 어머니를 겨우 말리고선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갈려고 대문 앞을 막 나서던 참에, 난집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된다.
언제부터 서 있었고 언제부터 울고 있었을까 이사람...
참으로 난감하였고 어른들 앞에서 그저 민망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자기도 따라 가겠단다. 아마도 작정하고 온 듯 싶었다. 아 이것은 또 뭔 신파극이람 그녀는 날 완전히 자기 애인으로 생각하는듯 하였다.
(아! 다 내 잘못이다. 마음에 없으면 없다고 했어야 하는지 순진한 사람 마음만 흔들어 상처나 주다니...)
또다시 유행가 가사가 생각났다.
"울어대던 그녀를 달래고 달래며 입영열차 타던 스무살 간이역. 그러나 수없는 터널을 지났을 때 스물넷 간이역에 찬란한 빛보이네 에~ 에헤헤에 에헤헤 기차야 달려라 달려라"는 노래가...
편지 자주 보내꾸마 하고 마음에도 없던 말로 겨우겨우 그녀를 설득시킬수가 있었다.
(이 나쁜놈!)
#10
남자동인들께서는 춘천이라면 어느정도 감을 잡으셨겠지만, 내가 입대하기로 한 장소는 강원도 춘성군 소재 102보충대였다.
난생 처음 가보는 호반의 도시 춘천.
어릴적 교과서에 실린 사진에서나 보던 소양강댐.
당시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한권쯤은 읽어 보았을 인기작가 이외수가 살고 있던 도시 춘천.
닭갈비가 유명한 도시 춘천.
그 미지의 도시 춘천을 향해 청춘 4명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청량리를 거쳐 저녁담이 되어서야 도착한 우리 일행은 숙소를 정한 다음 허기진 배와 알콜을 보충하러 닭갈비집이 즐비한 골목에 접어 들었고, 밤이 깊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며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얼큰한 목소리로 불러 제꼈다.
낯선 타향, 낯선 거리, 낯선 말투, 모든게 낯선 그곳에서...
낮 익은 4명만이 존재하는 밤이었다.
그 다음날 낮밤까지...
우리들은 술이 덜 깨어 불콰한 얼굴로 보충대 앞에서 작별을 한다.
나와 한명은 보충대 문으로, 두녀석은 부산으로...
그런데 막막하기는 네녀석이 다 그러 하였다.
입대를 하는 나와 친구 한놈은 보충대 문을 들어서는게 막막하였고,
고향으로 되돌아 갈 두 녀석은 우정이란 이름하에 진탕으로 술마시느라 차비까지 탈탈 털어먹는 바람에 집으로 가는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기에...
#11
일주일간의 보충대 대기기간을 마치고, 친구녀석은 춘천(춘성)쪽에 남게 되고 난 인제 원통으로 향하게 된다.
빡세기로 소문난 12사단 신병교육대로...
말로만 들었던 산넘고 물건너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소양강댐에서 군용선과 군용트럭을 갈아타면서...
앞으로 다가올 시련이라도 예견이라 한듯 긴장과 두려움을 가득 간직한체...
모든 익숙한 것들아 잘 있어라...
통통거리는 군용선에 앉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푸른 소양강 물속을 바라보면서, 청춘은 까닭모를 슬픔에...눈물에...얼굴을 묻는다.
실패가 없는 청춘을 유망하다고 말하지 말자
청춘은 기구할수록, 희망은 희박할수록 그 젊음과 희망의 참뜻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 이외수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살에는
선잠결에 스쳐가는
실낱같은 그리움도
어느새 등널쿨처럼 내 몸을 휘감아서
몸살이 되더라
몸살이 되더라
떠나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세상은 왜 그리 텅 비어 있었을까
날마다 하늘 가득
황사바람
목메이는 울음소리로
불어나고
나는 휴지처럼 부질없이
거리를 떠돌았어
사무치는 외로움도 칼날이었어
밤이면 일기장에 푸른 잉크로
살아온 날의 숫자만큼
사랑
이라는 단어를 채워넣고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눈시울이 젖은 채로 죽고 싶더라
그 투명한 내 나이 스무 살에는
춘천 입대길까지 동행하였던 한친구의 편지다.
여기 만천하에 자신의 옛편지가 공개된 걸 그는 좋아할까나? 말까나?
아무튼 민망스러웁기도 할꺼다. 하여 그 친구에게는 이사실을 함구하여야겠다.
내가 보낸 편지들이 그러하듯, 어디까지나 이 편지의 소유권 내지 저작권(?) 나의 것이 아니겠는가? ^^;
지금 의령소재의 종합병원장으로 있는 그 친구는 나의 오랜 동무로, 이글에서는 당시 이 친구의 고민상이 드러난다...
한번씩 옛추억의 편지들도 기회되면 올릴것을 얘기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