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들에게 쓰는 편지...

ebond 2010. 9. 9. 10:07

자랑스런 아들 준휘에게!

 

뭐가 되고 싶다거나...뭔가를 하고 싶다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정해졌다면 망설이지 말고 우물쭈물하지 말고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두려워 말고...

그런데 앞에서 말한 가치를 정한다는 것의 전제가 없는데 무작정 하고 싶은대로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속된 말로 그건 망하는 길 뿐이다.

 

그러나, 미래를 너무 멀리 두고 이 다음에 나는 판·검사가 될 거야. 장관이 될 거야

지금쯤 나는 뭐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다.

사람은 누구나 오늘을 산다는 것을 잊지 않길 아들아...

 

아버지는 힘들게 살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새벽 신문배달을 하였고 한달에 월급을 8천원을 받았지.

이 돈을 모아 중학교 입학할 때 등록금을 내고 교복 책가방 등을 쌌었지...

아버지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엔 가족들이 모두 김해로 이사 들어왔었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아버지는 가족들과 떨어져 삼촌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당시 삼촌집은 우유대리점을 하고 있었어,

아빠는 새벽에 우유를 받아 우유배달을 마치고 학교를 갔었지...

학교를 마친후에는 수금을 하러 다녀야만 했어.

월급은 없었고, 오로지 숙식 해결과 중학교 공부를 시켜준다는 조건이었지...

 

중학교 3년내내 휴일없이 이런 일의 반복이었지...

당시 아빠는 어린나이에 일이 너무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또한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도 컸었지...

 

중학교 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고등학교를 진학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는거야. 아버지(너에게는

할아버지이신)는 내가 상고나 공고를 진학하길 원하셨고 아버지는 인문계를 가고 싶었지.

고등학교 입학 합격증을 받았으나 약20만원의 등록금이 없었어...

할아버지는 내가 인문계 진학하는게 마음에 안들어 등록금을 안주셨고...

아마 돈도 없었던 것 같아...

할머니와 함께 삼촌집을 찾아 등록금만이라도 지원을 해달라고 사정을 하셨으나 삼촌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

아마 내가 삼촌집에서 나와 이젠 집에서 학교를 다닌다고 한게 불만이었던 것 같아...

일이 힘들어 당시 배달원을 구하는것도 쉽지 않았거든...

 

결국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한체 집에서 빈둥대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할머니는 남동생

(아빠에게는 외삼촌)이 소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대구의 자동차정비공장에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셨지.

기술만 있으면 밥은 먹고 살수 있다고...

 

그렇게 아빠는 17살되던 해에 외삼촌 집으로 들어가 기술(외삼촌은 그곳에서 부란자부분을 맡고 계셨지 부란자는

인젝션펌프라고도 하는데 대형자동차의 핵심부품이라고 할 수 있지)을 배우기 시작하였지...

하지만 기술이 배워지질 않는거야...아마도 가정형편도 생각하고 할머니가 사정사정해서 오긴 하였으나 적성도 안맞고

아직 내 마음이 준비가 안되었던 것 같아 그리고 공부에 대한 열정과 회한때문이기도 하였을거야.

 

6개월가량 외삼촌 밑에서 생활하다 결국 다시금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고 김해로 내려왔지 그러면서 집 근처

삼강제약사라고 조그마한 제약회사에 취직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제약기술을 배웠지...

그렇게 돈을 모아 한날은 제약회사 사장님에게 부탁을 하였지 630분이 퇴근시간인데 5시쯤 마치게 해 주시면

안되겠냐고...

 

아버지는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겠다 싶어 검정고시를 볼려고 하였는데 당시 김해에는

고시학원이 없어 부산 서면까지 나가야만 했었지.,.

다행히 그곳 사장님이 서울대 출신이었는데 아빠의 그런 사정을 듣고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지.

그렇게 하여 아빠는 5시에 남보다 빨리 마치고 서면에 있는 대한고시학원으로 갔지.

학원을 마치면 10:30분인데 당시 김해로 들어오는 128번 버스의 막차시간이 10:50분이었지...

파김치된 몸을 이끌고 겨우 막차를 타고 나면 서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행히 자리가 비어 좌석에 앉으면

버스에서 꾸벅꾸벅 조는게 일상다반사라 삼방동에 있는 집에 갈려면 김해 안동입구에서 내려야 하는데 구산동 종점까지

가는 날도 많이 있었지...

돈 한푼이 아쉬운 시절이라 구산동에서 삼방동까지 새벽이슬 맞으며 걷기도 많이 걸었지...

 

그런 생활 속에서 아빠는 대입검정고시에 합격 하였고, 이후 대학진학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그리움을 간직한체 군대를 가게 되었지...

 

군 제대후 아빠는 일단 야간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었으나 학비마련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직장을 알아보아야 했지.

그리고 미래에 부확실성으로 인한 우울한 불안감에 싸여있기도 하였지.

 

당시 부산 광복동에는 미화당백화점이 있었는데 서면의 태화백화점과 더불어 향토백화점의 인기가 대단했었지.

마침 미화당백화점에서 사원모집 공고를 보고 취직을 하였는데 당초 백화점 근무인줄 알았으나 내용과는 달리

슈퍼사업부에 배정을 받았고 아빠는 수습기간동안 부산 북구 덕천동 소재 미화당슈퍼에 근무하게 되었지...

 

그러다가 아 이건 내 갈길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김해 장유에 있는 산업용테이프와 필름제조업체인 한국케미칼에

입사 하였지...

이 역시 사무직으로 알고 들어 갔으나 실험실 인원이 부족하다하여 실험실에 배정 받았는데 생소한 일이라

나름 재미도 있었지...

하지만 이 또한 내 적성엔 안맞았거니와 개인회사가 되어 친인척들이 요직에 앉아 있는터라 이 역시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지...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전직을 꿈꾸었고 당시에는 공기업인 한전의 인기가 대단하였던지라

한전 취업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하여 서면에 있는 한전 부산지점에 시험을 접수하였었지...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들런 농협에서 직원채용 공고를 보았고, 이왕지기 다홍치마라고 농협에도 시험접수를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필기시험일자가 같은날이라 어느 한 곳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지...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고민도 하였으나 결국 농협에 시험을 치르기로 마음을 먹었고 마침내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었지...

그런 연유로 아빠는 지금까지 계속 농협에 근무하게 되었고 승진도 하게 되었구나.

 

아빠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어.

평범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직장생활하며 야간대학을 다녔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지.

그러나 내 집을 가졌으며 결혼해서 수빈이와 준휘를 낳았고 너희들의 커가는 모습을 보고 흐믓하였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 이것이 아빠의 꿈이자 행복이지.

그런데 이 세상에는 아빠처럼 사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세상엔 정말 많더구나.

 

이처럼... 아빠가 삐뚤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던건 언제나 묵묵히 뒤에서 지켜주고 기다려주던 할머니의 힘이 컸지.

 

아버지가 꿈을 잃어 방황할때도 아버지는 웃을 수 있었다. 내 뒤엔 할머니가 있으니까...

그리고 무시 당하는게 싫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된다는 자존심도 컸었고...

 

아들아 너도 너만의 가치가 생기거든 도전하렴...

아버지는 내 아들이 세상 안에서 늘 당당하게 설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아들에게 바라는 아버지의 소박하지만 유일한 큰 바램이다.

 

2010.8.30. 준휘에게 아버지가...